일제 강점기 시절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또 한 명의 매국노를 알게 되어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름은 노덕술. (1899 ~ 1968 )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 (1898년 ~ 1958)은 당시 액수 100만 원 (현재가치로 320억 원)의 현상금으로 김구 선생의 현상금보다 훨씬 높았던 독립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김원봉 의열단 단장의 독립 투혼은 일본군을 바짝 긴장하게 했는데 그 당시 노덕술은 일본 경찰로 근무했다. 그는 고문 기술을 개발하는 악질 경찰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경찰들이 배워갈 정도로 잔인한 고문 방법들을 동원해 조선인들을 고문했다. 그중 독립군도 여럿이었다. 당시 갓 스무 살 된 독립 운동가 김규직은 노덕술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 외에도 두 명의 독립운동가가 노덕술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노덕술의 친일 반민족의 작태에 조선인들은 모두 치를 떨었다.
노덕술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잔인한 방법으로 저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중일전쟁 발발 시 군사, 군수품 수송, 국방사상 보급 등 전시업무에 총력을 기울여 조선인들이 일본군 전쟁에 협력하도록 했다. 그 이후에도 사상 전도활동을 지속 전개하므로 일본제국의 아시아 점령에 이바지하여 조선인으로서 불가능한 고위직까지 승진하였다.
1945년 갑작스러운 광복 후 그는 잠시 체포되었으나 미군정이 필요로 하는 반공투사로 급히 변신하여 친일경찰 출신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장 수사과장에 기용된다. 광복 후 비어있던 일본 수뇌부 경찰들의 자리를 친일파 경찰들이 장악하여 계속 득세하고 있던 것이다. 1947년 노덕술은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으로 지목하여 체포하고 수차례 뺨을 때리며 조롱했다. 조사를 끝내고 나온 김원봉은 3일 동안 치욕의 눈물을 흘리고 월북하였다. 그러나 김일성과 노선을 달리했던 그는 숙청당하게 된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9년 노덕술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지만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노덕술을 헌병대로 복귀시킨다. 일제시대 때 동족을 향해 휘둘렀던 잔인한 폭력성과 경험치는 좌익 색출에 탁월했다. 그의 잔혹한 사상과 고문기술은 국민을 수호해야 하는 군인들의 사상을 더럽히고 변질시켜 무고한 시민의 학살을 야기시킬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매국노의 생애를 무난히 마치고 1968년 한국 땅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기사 및 정보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겨례 뉴스 - 동성애 지지엔 “이단”, 전광훈엔 ‘침묵’…한국교회 이중잣대 (0) | 2020.10.21 |
---|---|
'n번방'등 디지털 성 착취 실태, 어떻게 근절해야할까? | 기독교 윤리실천운동 긴급 좌담 현장 (0) | 2020.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