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부부의 사랑에 대해 더욱 소리 높여야 한다.
교회에서 다루는 죄가 이단, 동성애, 이념 등과 같이 멀리 있는 동네에서 가져오는 것들 뿐이라면 자신의 죄에 대한 통찰이 결핍된 것일 수 있다. 죄에 대해서 말하려면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닫는 것이 우선이다.
성도 마찬가지이다. 성에 대한 왜곡된 개념을 가진 채 간음과 음란과 동성애에 대해 말한다면 정작 자신의 성생활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부부는 정서의 교감이 전부가 아니다. 육체적 교감이 동반되야하고 두 사람의 잠자리가 휴식과 안식을 주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뜨겁고 설레는 연애감정의 사랑이 다 하게 되면 친밀함과 진실함과 깊은 신뢰감 속에서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결합의 축복을 부부 잠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결혼생활이 주는 행복과 안정감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가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으로 결속되어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머리로 깨닫는 데에서 더 나아가 몸으로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고통을 똑같이 느끼셨고,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기쁨도 똑같이 느끼셨다. 직접 오셔서 하늘의 기쁨을 자기 백성들에게 나눠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안수하시고 고치시고 기도하시고 먹으시고 주무시고 즐거워하시고 분노하시고... 등 진짜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머리로 아는 것, 참 중요하지만 몸으로 아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완전한 앎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몸소 깨닫기 위해서이다. 죄짓지 않기 위해, 음란을 막기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결혼이 죄를 차단하기 위함에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한 다음에 깨닫게 될 것이다. ' 난 결혼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남녀의 왜곡된 성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에 의해 망가지고 더럽혀지고, 부부의 잠자리에도 깊숙이 침투해 왔다. 부부의 잠자리를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성경 곳곳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지만 연약한 인간은 세상에서 배운 성생활을 버리고 아름다운 부부의 성생활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다.
부부 잠자리는 그 부부의 관계가 어떠한지 말해 준다.
겉으로 볼 때 남 부러워 보일 것 없어 보이는 모습들이 그 부부 사이가 어떤지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 둘이서만 서로 마주 보는 그 자리에서 직면한 모습이 그 부부 사이가 어떤지 말해주는 것이다. 배우자를 통해 비치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비참하다면 그 모습을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 배우자보다 내가 먼저 주님께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자기 문제가 해결이 안 된 사람일수록 배우자나 남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한다. 초점을 나, 나의 마음으로 향하여 자신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무정함과 미움이 가득한지 고백해야 한다. 주님은 죄를 씻어주는 분이시다. 그리고 다시 배우자의 앞에 설 때 새 마음으로 부드럽게 관계를 재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용기와 겸손함이 힘이다. 용기와 겸손함은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이다. 배우자의 얼굴을 감싸주고 토닥여주면서 나의 마음도 위로받고 사랑과 생명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부부 트러블로 마음고생이 심하여 좌절된 사람들은 성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전면적으로 주님 앞에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해야 한다.
부부관계의 치료자도 역시 예수님이 답이다.
2020.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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