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역자이든 평신도이든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서 얼굴도 못 드는 죄인이다.
사역자 부부라고 부부관계에 뭐 크게 다른 점은 없다.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 답답하고 싫어진다.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먹고 자며 생활한다고 관계가 점점 좋아지는 건 아니다. 이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에서 오는 트러블들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한다.
부부 트러블의 원인이 미성숙한 인격과 가족관계의 문제들도 한몫씩 하겠지만, 부부가 이성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갖고 있다면 서로 힘들어하는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어떤 부부가 서로 미워하는 날이 1년 365일 중 300일이라고 하면, 이성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경우 150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전자의 경우 서로 잘 지낼 수 있는 날은 1년 중 65일이고 후자의 경우 잘 지내는 날이 무려. 215일로써 그 차이가 굉장하다고 볼 수 있다.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일상생활이 힘들어진다. 미울 때 미워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진다면 마음에 병이 올 수 있고 건강까지 해친다. 미움은 마음에 가시엉겅퀴를 내어 인생을 어렵게 만든다.
만약 배우자에게 용서할 수 없는 감정, 증오와 혐오의 감정 같은 격한 감정이 있다면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혼하고 다시 출발이 아니라....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부부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생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나그네의 인생과도 같아서 배우자를 나의 인생에서 일정 기간 만나 여정을 함께 걷다가 다시 헤어질 연인으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철저히 혼자인 나를 직시할 수 있다면 내 옆에 한 동안 있어줄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를 질문해볼 수 있다.
배우자가 내 곁을 떠난다면 ?
내 아이들이 사라진다면?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다면?
갑자기 나에게 재난이 닥친다면?
갑자기 나에게 무서운 병이 생긴다면?
. 등등
세상에서 들려오는 사건 사고 등을 내 상황으로 가져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나에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해 보고 생각하는 연습은 불필요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곧 나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저런 엄청난 일을 가정했음에도 배우자가 아무 의미 없다면 그때는 이혼을 생각해 볼 만큼 의미 없는 사람일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금 새로이 볼 수 있다.
늘 '나'로써 배우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진실된 내가 없이는 배우자가 온전할 수 없다. 부부관계는 마치 거울이 되어주는 관계와 같다. 내가 깨져있으면 거울 속의 배우자도 깨져 보인다.
내가 뽀드득 깨끗이 닦여 있으면 배우자가 맑게 비친다.
참 신비스러운 관계이다.
부부란 무엇인가?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마친 한 남자와 한 여자라고만 정의할 수 있을까? 어떤 큰 알맹이가 빠져 보인다. 그 큰 알맹이가 없는 부부들이 결혼이라는 울타리만을 중시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 같다.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의 죄성이 허용되는 것처럼 구는 경우도 본다. 울타리 밖에서와 달리 안에서는 고삐가 풀린 망아지가 되어 버리는 격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부들조차 처음 만났을 때는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서로에게 이끌리고 함께 하고 싶어 하고 사랑을 느끼고자 했었다.
부부는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공식적으로 한 몸을 이루는 관계를 말한다. 한 몸을 이뤄가는 부부를 성경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한 몸을 이뤄가는 관계는 애석하게도 모든 부부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님을 본다. 무늬만 부부, 쇼윈도 부부, 별거 등 법적으로는 부부 같으나 아닌 이들이 세상에는 널리고 널렸다. 한 몸을 이뤄가는 부부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부부에게서 (현실적으로 일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부부"의 현실은 아프지만 그래도 주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건설적인 부부상을 쫓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부의 사랑을 맛보길 기대해야 한다.
부부는 상호적인 관계이다. 배우자와 유기적으로 함께 소통하고, 배우고, 커가는 관계이다. 그런데 자꾸 자기주장을 하게 되면 서로의 관계는 곤란해진다. 내가 아무리 상대를 위한 언행을 한다고 해도 상대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멈출 줄 알고, 자신이 주장하던 바를 "사실은 나도 잘 몰라"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배우자를 먼저 생각하는 기본적인 마음이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당신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은데, 얼핏 보면 이타적인 것 같으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보상심리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를 잇는 생각은 곧 '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 마땅히 어찌어찌 대해야 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계는 부부관계를 악화시킨다. 그럼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럼 배우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바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만약 일방적으로 요구한다면 상대를 매우 힘들게 하는 일일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본다면 남편은 보통 아내에게 자신을 인정해주고 성생활에 적극적이며 자신을 끝까지 신뢰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내는 보통 남편에게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가사 육아 일에 적극 참여해 주며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란다.
이런 기대감들은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기대도 하고 부탁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대와 희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이다. 마음을 지키며 때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훌륭한 인격의 소유일까? 현실은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부부가 되면 산더미 같은 현실 문제 때문에 배우자의 존재감이 약해진다. 어떤 경우에는 버거운 현실 때문에 투정의 대상을 배우자로 지목하여 배우자를 힘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희망이 실현되지 않은 것의 원인을 배우자의 탓으로 돌리고 배우자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성경의 첫 번째 죄악인 선악과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부부 사이에 그대로 드러난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선악과를 먹어보니 하나님처럼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물으실 때 서로의 탓만 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바로 나와 내 남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지금 널 미워하는 것이 너 때문이다."라는 마음을 계속 품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정해놓은 헛된 기준과 바람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을 도우시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남편과 아내는 보상심리라는 이기심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의 비전대로 배우자가 따라와 주기만을 고집하지 않고 내 비전과 배우자의 비전이 닮아가는 과정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베풀 수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이 어느 선까지인지 잘 파악하면서 배우자와 원만해지기를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마음의 여유는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데에서 얻을 수 있다. 부모에게서 봐온 잘못된 부부의 상이 내 생각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자각하고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새롭고 거룩한 부부의 소명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부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뜻이 거짓으로 결박된 결혼 생활에서 자유롭게 하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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